2016년 1월 25일 월요일

[그라치아] '백합'은 어떻게 드라마가 됐을까

+'그라치아' 70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대세는 백합>, 여자 둘이서 여기도 핥고 저기도 핥고 딸꾹질이 단방에 멈출 만큼 찐하게 키스까지 한다. 잠깐. 어떤 드라마에서 여고생 둘이서 입술 박치기 하는 장면 좀 넣었다고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경고를 받은 게 얼마 전이었던 거 같은데. 막말로 혀를 섞은 것도 아니고 입술을 맞댔을 뿐인데 파격적인 키스신이니 동성애를 조장하느니 온갖 논란에 휩싸였잖아. 뭐였더라. <선암여고탐정단>. 

혹시라도 자녀들이 드라마를 보고 위험한 동성애에 물들어 버릴까봐 걱정된 학부모들까지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어떤 방통위원은 심의 과정에서 ‘동성애는 부도덕하다’라는 지극히 차별적인 의견을 내세웠고 결국 해당 드라마 피디는 심의위원 앞에서 진심어린 사과까지 했다. 10대부터 50대 여성들의 동성애를 다뤄서 논란이 되었던 단막극 <클럽 빌리티스의 딸들>도 마찬가지였다. 방송 이후 학부모들과 일부 기독교 신자들은 방송국 앞에서 시위를 벌였고 결국 방송국에서는 다시보기를 막아놓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렇게 피켓 들고 부지런히 거리로 나섰던 학부모들이 이번엔 조용하다. 갑자기 사람들 인식에 변화가 일어난 건가. 미국 50개주 전역에서 동성결혼이 가능해진 걸 보고 동성애를 혐오하던 스스로가 너무 부끄러워 생각을 바꾸기로 한 걸까. 설마 이렇게 빨리? 정말 이렇게 빨리 바뀐 거라면 당장 내년에 한국에서 동성결혼이 가능해져도 별로 놀라울 게 없을 것 같다. 정말로 사람들이 달라지기라도 한 걸까. 사실 ‘백합’의 역사는 길고도 깊다. 굳이 할리퀸이나 팬픽 이야기까지는 가지 않아도 된다. 이미 1999년에 개봉한 영화 <여고괴담 2>에서도 여고생 둘의 교실 키스신이, 2009년 영화 <오감도>에서는 레즈비언 섹스신이 있었다. 그렇다고 상영중지라거나 감독의 대국민 사과 같은 건 없었다. 

어쩌면 자녀가 걱정되는 학부모들을 비롯한 동성애자가 너무 싫은 ‘그분들'은 오로지 텔레비전에만 관심이 있는 건 아닐까. 텔레비전이 가진 힘이 막강하긴 하니까. 사람들은 돈이 안 되는 컨텐츠를 되도록 만들지 않는다. 만들어낸다는 건 돈이 된다는 뜻이다. 게다가 '그분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는 텔레비전을 피한다면 논란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 유레카! 인터넷 시대니 웹컨텐츠를 만들면 되지! 돈줄을 쥐고 있는 이들이 이 사실을 알아챈 게 아닐까. 


<선암여고탐정단> 방통위 심의가 있던 날 성소수자 인권 단체들은 동성애 검열을 비판하며 키스 시위를 벌였다. '그분들'의 생각은 결코 어느 날 갑자기 그냥 바뀌지 않는다. 텔레비전에서 여자들의 애정신이 더 이상 논란이 되지 않는 그날은 생각보다 더 오래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바로 그날, ‘백합’은 진짜 대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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