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11일 금요일

[경향신문 향이네] 나는 섹스에 대해 이야기하는 '여자'

경향신문 뉴스큐레이션사이트 ‘향이네’가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와 궁금증을 풀 수 있는 기획을 마련했습니다. 기획에 참여한 필자들은 “페미니즘이 남성과 여성 모두의 삶에 풍요를 가져다 줄 수 있는 학문이자 운동”이라고 말합니다. ‘페미니즘이 뭐길래’ 함께 읽어보시죠. 연재글 의견은 h2@khan.kr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나는 섹스에 대해 이야기하는 ‘여자’

“아, 섹스 칼럼니스트?”
섹스에 대해 글을 쓰는 사람을 섹스 칼럼니스트라고 부른다. 나도 섹스 칼럼니스트라고 불린다. 섹스에 대해 글을 쓴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말한다. “아, 섹스 칼럼니스트? 그 미국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에 나오는 캐리처럼?” 조금 많이 다르지만 그냥 귀찮으니까 비슷한 거라고 한다. ‘섹스’를 말하는 ‘여자’라면 그냥 다 하나로 묶고 싶은가 보다. 섹스에 대해서 글을 쓰는 여자라고 누군가에게 말을 하는 것은 일종의 커밍아웃과도 같다. 실제로 누군가에게 애인이 여자라고 커밍아웃했을 때와 섹스에 대해서 글 쓴다는 사실을 밝혔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비슷하다. 주변 지인들이나 친한 친구들은 이미 내가 바이섹슈얼이고 여성과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굳이 커밍아웃할 일이 없는 편이지만 어쩌다 가끔 새로운 인물을 알게 되면 커밍아웃을 해야 되는 경우가 생기곤 한다. 여자랑 사귄다고 말을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반응을 보인다. ‘아 너 뭐야? 레즈비언? 아 바이섹슈얼~ 그럼 홍석천 같은 거네. 나 마녀사냥 진짜 좋아하는데. 와 나 바이섹슈얼 실제로 처음 봐~’ 그래. 처음 봤으면 많이 봐야지. 실컷 봐라. 바이섹슈얼이라고 커밍아웃하면 홍석천 소리를 듣고 섹스칼럼니스트라고 커밍아웃하면 캐리 소리를 들으니 인생 참으로 살맛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얼마나 떠올릴만한 사람이 없으면 그러나 싶어 씁쓸해지기도 한다. 공중파에서 공개적으로 커밍아웃한 여자 연예인이나 방송인은 아직까지 한명도 없다. 성별은 다르지만 동성을 좋아한다는 연예인 홍석천을 떠올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섹스 앤 더 시티는 뉴욕 시티의 잘나가는 백인 여성 네 명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로 한국에서 미국 드라마가 한창 뜨기 시작했을 때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드라마 속 캐리는 섹스 칼럼니스트의 대표적 이미지로 사람들의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아있다. 그러니 섹스칼럼니스트라고 하면 캐리를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된다. 물론 섹스에 대해 글을 쓰는 여성들이 그만큼 적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자가 섹스에 대해서 글을 쓰면 사람들은 내용보다는 ‘여자’가 ‘섹스’에 대해 글을 쓴다는 사실 자체에 집중한다. 얼마 전 나는 책을 냈다. 섹스에 대한 내 경험을 바탕으로 쓴 에세이와 다른 여성들의 섹스 인터뷰를 묶었다. 사람들은 섹스에 관심이 많다. 신문 기사나 잡지 기사만 봐도 알 수 있다. 섹스에 관련된 기사들은 무조건 인기가 있다. 제목에 섹스가 들어가면 더 잘 먹힌다. 내 책 제목에도 ‘섹스’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다. 요즘 같은 출판 불황기에 출간한 지 보름도 안돼서 2쇄를 찍었다. 자랑이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좁은 상상력
책이 나오고 경향신문 저자와의 대화에 내 인터뷰(▶바로가기 [저자와의 대화]한국 남성들의 ‘찌질함’ 폭로…“여성의 욕망을 솔직히 털어놓자”)가 나갔다. 메이저 언론에서는 처음으로 얼굴을 공개했다. 요즘은 신문사도 SNS를 열심히 한다. 내 사진과 인터뷰 내용을 포토샵으로 편집해서 올려주신 덕분에 기사 좋아요 수와 리트윗 수가 유명 연예인 열애 기사 못지않았다. 기사 밑에는 많은 댓글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이건 비밀이지만 난 사실 약간의 마조히스트 기질이 있는 지라 누군가에게 욕먹는 것을 좋아한다. 거기에 더해 누군가가 헛짓하는 것을 보면서 비웃고 즐기는 악취미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열심히 댓글을 읽고 분석해 유형을 나눠보았다.
첫 번째, 외모를 공격한다. 외모를 공격하면 내가 충격이라도 받을 거라 생각했나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화가 나지만 논리적으로 반박하기 힘들 때 상대방의 외모를 공격하거나 쌍욕을 한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란 여성답게 어려서부터 각종 외모 공격을 받으며 자라왔다. 눈이 너무 커서 빠질 것 같다거나 허벅지가 너무 두꺼워서 터질 것 같다는 식의 이야기들을 항상 들으면서 살았다. 그런 나한테 ‘절벽가슴’이라는 말이 뭐 그리 큰 상처가 되겠나. 그냥 그런가보다 했다.
두 번째, 어리다고 놀린다. 내가 소녀시대도 아니고 어리다고 놀리는 건 대체 뭔가. 스물일곱 살짜리 어린 여자애가 섹스에 대해서 아는 척 하는 게 꼴 보기 싫었나보다. 아무래도 섹스는 남성들의 영역이니까. 그 영역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 여자애가 발을 들이니 자존심 상했나보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서른 살이 넘어가는 순간 난 ‘노처녀’ ‘아줌마’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본격적으로 자위를 했고 열다섯 살 때부터 파트너 섹스를 했으니 결코 짧지 않은 시간과 적지 않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내가 뭐가 어리냐고 반박하거나 나도 섹스 할 만큼 해봤다고 말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냥 아, 네, 저 어려요. 이러고 넘어가면 된다. 이것도 외모 공격만큼이나 참 쓸모없는 공격이다.
세 번째, 이게 무슨 페미니즘이냐고 말한다. 오랜 시간 동안 남성들은 페미니스트들을 욕구불만 혹은 남성에게 사랑받지 못해서 삐뚤어진 여성의 이미지로 굳혀왔다. 그들의 혼란스러움이 충분히 이해 간다. 분명히 페미니스트라면 연애도 못하고 섹스도 못하고 세미나실에 처 박혀 있어야 하는데 갑자기 눈앞에서 남자랑 섹스 한 각종 이야기를 쏟아내니 얼마나 당황스럽겠는가. 페미니스트가 무슨 상상 속의 동물 기린도 아니고 지구상에 얼마나 많은 페미니스트가 있는데 한 번도 본적이 없다니 측은해진다.
네 번째, 시집은 어떻게 가려고 하냐며 걱정한다. 걸레라거나 더럽다거나 줘도 안 먹는 다는 말도 함께 덧붙인다. 남성들은 섹스에 대해서 말하는 여성을 좋아한다. 섹스 이야기하는 여자들은 언제든지 자신이 원하면 쉽게 다리를 벌려줄 것 같기 때문이다. 다만 남성들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붙는다. 항상 격려해주며 자신감을 북돋아주는 심인성 발기부전을 가져다주지 않을 그러니까 엄마처럼 다정하고 설리번 선생님처럼 모르면 친절하게 가르쳐주는 여성 말이다. 그런 남성들이 날 좋아할 리가 없다. 그러니 무조건 욕을 한다. 걸레, 줘도 안 먹는다. 그리고 모든 여성들이 남성과의 결혼을 원할 거란 좁은 상상력을 동원해 최선의 욕을 만들어낸다. 저래 가지고 시집이나 가겠어? ‘최고의 운동은 그런 남성들과 만나주지 않는 것’이라던 모 여성학자의 말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경향신문 2015년 3월7일 [적이 된 페미니스트]“온라인서 페미니스트라 밝히면 욕설만 되돌아와”
때론 돈 벌려고 별짓을 다한다며 남성이 섹스에 대해 글 썼으면 변태 소리나 듣지 이렇게 기사에 나왔겠냐며 여자라서 좋겠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섹스에 대해 말하는 건 남자한테도 어려운 일인데 괜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끌어와서까지 일반화 시켜 여자라서 섹스에 대해 말하기 힘들고 차별받는다는 말을 하는 건 대체 뭐냐는 말도 함께 얹어서 말이다. 그럴 땐 역사 공부의 중요함을 느낀다. 남성들이 대체 섹스에 대해 말을 자유롭게 못한 적이 언제 있었나. 설마 엉덩이 닳는 것도 아닌데 못 만지게 했다고 투정부리는 건가? 섹스하고 싶어서 꼴린다고 말했을 뿐인데 성희롱이라고 해서 심통이라도 나셨나보다. 정말 깜둥이라고 말할 자유를 외치는 백인 같은 소리하고 앉아있다. 섹스에서도 남성들이 한발 더 앞서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지 이미 언제 적 마광수가 다 한 건데 지금도 이러고 있냐는 말을 하는 남자들도 있었다. 섹스에 대해 글을 쓴다는 이유로 마광수와 비교 당하다니 정말 굴욕적이었다. 마광수의 글은 자유롭고 솔직하게 섹스에 대해 썼다고 평가 받지만 사실 그의 글은 지극히 남성 중심적인 시선으로 쓰인 글이다. 마광수라니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라는 말이 차라리 고마울 정도다.
왜 여성은 섹스를 말하면 ‘수난’을 겪을까
남성들에게 여성들이란 오랜 시간 동안 공짜로 밥도 해주고 빨래도 해주고 청소도 해주던 존재였다. 그런 여성이 일을 하고 돈을 벌다니 그것만으로도 남성들은 충분히 기분이 상한다. 게다가 다른 것도 아니고 저기 다리 벌린 이야기로 책을 내고 돈을 벌고 신문 기사에도 나오니 막 짜증이 나는 거다. 돈 벌려고 별 짓 다하네. 무슨 섹스 많이 한 게 자랑이라고 계집년이 떠벌리고 다녀. 섹스 이야기 좀 했다고 저렇게 기사도 나오고 돈도 벌고 책도 내고 여자라서 좋겠다. 내가 이래 봬도 남잔데 3초에 한 번씩 섹스 생각한다는 그 섹스의 아이콘 남성이 바로 난데 섹스 이야기라면 자신 있는데 나는 무슨 말만 하면 변태라고 하거나 성추행하지 말라고 하면서 쟤는 여자라는 이유로 섹스 이야기해도 괜찮은 거야? 역차별이야. 뭐야. 나도 잘 할 수 있단 말이야. 남성들은 그렇게 지금 이 순간에도 댓글을 달며 삐죽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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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들은 대부분 내 책을 읽지 않은 이들이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내 책을 읽는다고 해도 제대로 이해나 할 수 있을 지 의문이 든다. 꽃이 아무리 말을 잘해도 그건 말 잘하는 꽃일 뿐이지 그 누구도 꽃이 전하려는 말의 내용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내가 아무리 논리적으로 글을 써도 사람들이 ‘섹스’에 대해 ‘여성’이 쓴 글이라고만 본다는 사실은 힘 빠지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못 알아듣는 남자들을 굳이 밥숟갈 정성껏 떠먹여주면서까지 챙기고 싶지 않다. 분명 내 글을 이해하고 알아주고 공감하는 여성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걸로 충분하다. 여성들이 내 글을 보고 힘을 얻는 다면 그래서 스스로 섹스를 말할 용기를 얻는 다면 난 그걸로 족하다. 내가 겪는 일들을 보고 누군가 ‘수난’이라고 말했다. 난 댓글을 하나하나 읽으면서 내가 왜 섹스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 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봤다. 저런 남자들 때문이었다. 한편으론 고맙기도 하다. 저런 남자들이 없다면 내가 글도 못쓰고 책도 못 냈을 거 아닌가. 아마 지금 이 글도 못 썼을 거다.
섹스에 대해서 글을 쓰는 여자들은 드물다. 남성들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방식으로 섹스에 대한 글을 쓰는 여성도 어느 정도의 수난은 예상해야 한다. 섹스하자며 덤비는 남자들이 곳곳에서 예고 없이 나타날 테니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도 필요하다. 남자와만 싸워서 된다면 참 좋겠지만 때로는 여자들과도 싸워야 한다. 어린 시절 순결 교육을 빡세게 받고 자랐던 엄마와도 싸우고 그 엄마 밑에서 자란 덕에 내 몸 속에 차곡차곡 쌓여온 섹스에 대한 강박과도 싸워야 한다. 사람들은 종종 나에게 섹스에 대해 자유롭게 말하는 모습이 멋지다거나 부럽다고 말한다. 나도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다. 10대 시절의 섹스 이야기를 처음 꺼낼 때는 욕을 많이 먹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두려웠다. 글을 쓰면서 내 안의 나를 깨고 나올 수 있었고 더 많은 이야기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도 나와 주변의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지만 분명 여기까지 오는 데에는 싸움이 필요했다.

남성잡지 ‘맥심 코리아’는 지난 9월호 표지에 여성 납치를 연상시키는 화보를 실어 남성들의 왜곡된 성적 판타지를 드러냈다는 비판을 받았다.
‘빨갛다’는 이유만으로 같지 않다
‘여자’가 ‘섹스’에 대해 글을 쓰거나 말을 한다고 해서 의미가 있는 시대는 분명 지났다. 어떤 맥락에서 이야기하는가에 따라 주제가 같은 글도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남성들을 살살 달래가며 야한 속옷을 입고 침대를 뜨겁게 만들라는 글과 나의 글이 과연 ‘여성’이 ‘섹스’에 대해 썼다는 이유만으로 같을까. 전혀 아니다. 섹스를 성인 여성으로서‘만’ 누려야 할 즐거움이라고 말하는 여성이 10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말하는 나와 같을까. 섹스를 남성과 여성의 숭고한 결합이라고 말하는 여성이 과연 여자끼리 하는 섹스에 대해 말하는 나와 같을까. 절대 그럴 리 없다.
이렇게 분명히 다르지만 여전히 ‘여자’가 ‘섹스’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이유만으로 같이 묶이는 것이 사회적인 현실이다. 게다가 ‘섹스’에 대해 이야기하는 ‘여성’이 받곤 하는 각종 수난들을 떠올려보면 아직은 ‘여자’가 ‘섹스’를 말한다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의미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갈 길이 멀었다는 뜻이다. 섹스에 대해 이야기하고 글을 쓰는 여성들이 점차 더 많아진다면 내 글은 ‘섹스’와 ‘여성’을 넘어서 평가받을 수 있을까. 몇 명 되지 않는 여성 섹스칼럼니스트 중 한 명으로 주목받는 것이 싫지는 않지만, 섹스에 대해 글을 쓴다는 이유만으로 섹스에 관련된 작업을 하는 모든 여성들과 무조건 하나로 묶이는 것은 결코 반갑지 않다. ‘빨간 사과’와 ‘빨간 의자’가 빨갛다는 이유만으로 같을 수는 없다. 사과는 과일이고 의자는 가구다. 무조건 같다고 묶어놓으면 사과랑 의자가 얼마나 시무룩하겠나.

2011년 7월9일 한국에선 처음으로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슬럿워크(Slutwalk) ‘잡년행진’ 참가자들이 행진하고 있다. 캐나다의 한 경찰이 “성폭행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여성은 매춘부 같은 야한 옷차림을 피해야 한다”고 말한 것에 반발한 여성들이 노출 심한 옷을 입고 거리를 행진한 것에서 시작된 이 시위는 ‘성범죄는 피해자의 (범죄, 동기) 유발 여부가 아니라 가해자의 책임 문제’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댓글 2개:

  1. 책이 나왔었군요! 함 찾아봐야겠네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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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책을 이해 못 하는 게 아니라 책의 부족한 부분을 비판하는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세요? 굳이 책까지 가지도 않고 이 짧은 글만 봐도 글에 부족한 점이 너무 많거든요.
    '남성들에게 여성들이란 오랜 시간 동안 공짜로 밥도 해주고 빨래도 해주고 청소도 해주던 존재였다.'라고요? 글을 반대로 돌려보죠. '여성들에게 남성들이랑 오랜 시간 공짜로 돈을 벌어다주고 가정의 대소사를 책임졌으며 사실은 아니지만 저 남자에게 성폭행 당했다고 무고로 신고해서 돈을 뜯어내거나 이혼을 통해 재산을 가져가도 되는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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